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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뮤지컬이 보고 싶은데 오랜만에 김수용의 이름을 발견해서 반가운 맘에 예매했던 게 한 달도 더 된 것 같다. 작품에 대해선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다가, 관람 전날 살짝 극장 홈피에 들어가보니 몇 개의 넘버가 링크되어 있었다. 그중 이 작품의 메인곡(?)인 루비목걸이. 두 명의 주인공 버전. 두 배우의 보컬 스타일 차이가 너무나 극명해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 작품 자체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있지만 김다현 버전도 한 번 보고 싶긴 하다. 보러 갈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원작은 미완의 희곡. 그걸 국내 제작진이 뮤지컬로 만들었다는 것도 극장에 가서야 알았다. 영웅의 윤호진 감독이 만든 거라길래 '오오~' 했다. <영웅>은 참 모든 면에서 좋게 본 뮤지컬이다. 음악은 영국의 어느 인디밴드가 만들었다고 한다. 사실 다른 것보다 음악이 너무 좋기도 좋고 무엇보다 너무 스타일이 독특해서 이 뮤지컬이 국내 창작일 거란 생각을 못했었다. 입장하기 전에 데스크에 OST 앨범은 없냐고 물었을 때 누군가 너무나 씩씩한(?) 목소리로 "없어요!" 하길래 오리지널 캐스트 앨범도 없나 생각했었는데 국내 창작에 초연에... 아직 OST가 없는 게 당연했던 거다. 하여튼 이 뮤지컬 최고의 장점은 그 독특하면서도 멋진 음악이고, 두번째 장점은 독특하고 멋진 춤이다. 스텝을 강조한 군무가 특히.
뮤지컬이, 음악도 짱이고 춤도 좋은데 그럼 된 거 아님? 연기도 좋았다. 튀는 사람 없이 다들 무난했고, 특히 여성 앙상블들이 너무 좋았다. 연기들이 찰지십니다!! 김수용밖에 안 되는 김수용적인(!) 연기는 여전했다. 윤호진 감독이 어딘가의 인터뷰에서 불쌍하고 안쓰러운 주인공을 만나면 김수용을 제일 먼저 떠올린다고 했는데 역시 업계의 평판도 그렇구나 싶어 재미있었다. 불쌍함의 극단을 폭발시키는 압도적인 힘이 있다. 불쌍한 카리스마? 말이 웃긴데 김수용은 그렇다. 불행, 좌절, 절망, 예민함, 광기, 죽음. 이 사람이 아가씨와 건달들이라든지 (심지어) 아이다라든지, 뭔가 좀 마초적인 그런 인물을 맡는다면 어떨까? ...아니 누가 맡겨주긴 할까?! 너무나 잘하는 것이 따로 있으니 더더욱.
아쉬운 건 연출과, 무엇보다도 각본이다. 스토리다. 8년이나 준비한 국내 창작 뮤지컬임을 알고서 더더욱 속상하고 안타까웠다. 우리 문화산업에서 가장 딸리는 게 어딜 가나 스토리인 것 같다. 미완의 희곡이 원작이라 더더욱 뮤지컬적인 드라마로 만들어내기 어려웠으리라 짐작은 가지만, 배경도 흐릿하고 스토리와 인물의 감정은 뚝뚝 끊기고 왜 나오는지 모르겠는 인물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의미없는 장면이 삽입되고... 기타등등.
의미없는 장면, 왜 나오는지 모르겠는 인물들이 짜증나기보다 안쓰러운 건, 음악이 좋아서다. 슈미츠의 솔로곡은 참 감미롭고 구슬펐다. 서커스의 앙상블 넘버도 멋졌다. 근데 슈미츠는 극에서 하등 쓸모가 없고 괜히 개연성을 망치는 이상한 행동들만 한다. 서커스 역시 음악만 좋지 장면 연출로서는 어색하고 붕뜬 채였다. 원작의 배경은 1800년대 독일이라고 하는데, 생체실험이라고 하면 당장 '마루타'부터 떠올리게 되는 우리로선 '완두콩만 먹으면서 스트레스 만땅 채우면 인간은 어떻게 될까'라는 유치한 질문과 '생체실험'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잘 어울리진 않는다. (물론 보이첵에게 가해진 폭력이 유치하다고 해서 덜 잔인했던 것은 아니다.)
단순히 개미를 눌러죽이며 재미를 느끼는 듯했던 중대장과 박사의 유아적인 표현과 '멋진 박사님'에 대한 연구원들의 찬양 시간에 보여준 그로테스크하고 근대비판적인 느낌도 서로 잘 맞지 않는다. 극 초반에 순수한 사랑에의 탐닉을 노래하던 보이첵이 곧바로 마리에게 달려가서 보여준 (계급적) 절망감도 단절이 느껴졌다. 꿈에 대해 이야기하던 마리가 다음 순간 물질에 현혹된다는 설정도, 할매에게 아이를 부탁한 채 갈대밭에 남아 '루비목걸이'를 기다린다는(!) 설정도 캐릭터가 너무 오락가락한다는 느낌. 슈미츠의 우정은 세상을 구원할 것 같다가도 다음 순간 먼저 쿨쿨 자버리는 무심함의 극치... 게다가 탈영병이 막사엔 어떻게 들어온 거냐능...
한마디로 좋은 음악들과 인상적인 장면들에 대한 욕심이, 그것을 탄탄하게 이어주고 설득력을 부여해줄 스토리와 캐릭터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해 시종일관 뒤뚱거린다는 인상이었다. 한쪽 면에서의 감탄할 만한 성취가, 다른 한쪽의 부끄러운 완성도 때문에 충분히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향후 독일어나 영어로 번역할 계획까지 있다고 하는데, 이런 스토리와 구성을 가지고 국내외의 관객들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떤 면으론 참 좋았던 작품이라 짜증이나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안쓰럽고 속상한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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