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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만년필 뽐뿌가 다시 밀려와서 검색해보다가 꽂힌 파이로트 에르고그립.
저렴한 가격에 군더더기 싹 빼고, 닙은 4만원대 파이롯트 프레라와 같은 닙을 사용했으니 보급형이긴 해도 싸구려는 아니다. 이걸 가져야겠어...!!! 라고 결심하고 바로 질렀는데
컨버터 돌아다니는 게 하나 있길래 그걸 쓰면 되겠거니 하고 힘으로 밀어넣다가 약하디 약한 플라스틱 연결부를 깨뜨려버려 기껏 사놓고 시필조차 하지 못한 뒤 멘붕에 이르러, 추가 주문을 넣었다. 그리고 이젠 두 번의 실패는 없다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젤 비싼 만년필 한 자루는 형부에게 줬지만, 아빠가 늘 옆에 두고 쓰시던 저렴이들은 그대로 필통에 방치되고 있었다. 언제 날잡아 세척하고 쓸 수 있는 것들은 써야지, 생각만 하면서 미뤄두고 있었는데 지금이 그때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필통을 엎었는데.
그래. 처음에 아빠 연구실 정리하러 갔을 때 첫만남도 기억 난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무슨 의료기구인가... 근데 이걸 어떻게 여는 거지? 이리저리 만져보다가 그냥 필통에 꽂아두었었다. 그때 그 물건이 에르고그립이었을 줄이야. 쇼핑몰엔 검정색과 투명한 몸체밖에 안 팔던데 이건 사진은 좀 파랗게 나왔지만 연보라색에 가깝다. 아빠 이거 어디서 샀어요? 나 9600원 주고 샀는데 아빤 얼마 주고 샀어...?
우린 얼마나 닮았는지. 이 취향의 귀신같은 유전. 따로 가르침 받은 적도 없는데 고딩 때부터 만년필에 꽂혀서 이런저런 것을 사모으던 나를 보며 허허 웃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우린 둘 다 몇십만원짜리 명품엔 관심 없었다. 60만원짜리 형부에게 넘어간 그것도, 아빠가 하도 만년필을 좋아하니까 엄마가 하나쯤 비싼 걸 갖게 해주고 싶다고 선물했던 거고, 예전엔 1500원짜리 파이롯트 만년필이 주종이었다가 내가 소개한 로트링 아트펜도 즐겨 쓰셨고.
근데 아빠. 에르고그립 이거 왜 아빠만 알고 썼어요! 나한테도 좀 추천해주지!!!
...라기엔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만년필 취미가 많이 사라지기도 했었고, 뭣보다 우리가 얼굴 맞대고 얘기할 시간 자체가 별로 없었지.
마치 내 자신이 나를 위해 준비해준 듯, 아빠가 남긴 두 자루의 에르고그립을 신기하게 자꾸만 바라보게 된다. 내가 그이고, 또 그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아끼며 사랑해주어야 할, 내 부모님의 최고의 유산은 결국 나 자신이 아닌가. 그들을 놀랍도록 닮은, 닮을 수밖에 없었던 좋은 점과 나쁜 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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