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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분명히 한 번 읽은, 그것도 아주 재밌게 읽은 책도 한참 뒤 다시 읽으면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걸까? 심지어 미스테리 소설인데 분명 읽었던 건 기억 나면서도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까지 누가 범인인지 생각이 안 나는 경우마저 허다하다. 이 정도면 중증인 것 같긴 한데, 언제 다시 읽어도 처음 읽는 것처럼 재밌다는 건 장점일까? ㅎㅎㅎ
스기무라 부부의 문제를 더듬어 올라가는 길, 그 두 번째. 계속 눈에 띄는 건, 스기무라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는데(?) 각종 사건이 계속 그에게 얽혀드는 상황을 놓고 인물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 스이렌 주인장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스기무라에게 "사건을 불러들이는 힘"이 있다고 표현한다. 기타미 탐정은 그에게 사립탐정의 길을 권하고, 나중 얘기지만 자기 후계자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비칠 정도. 또한 나호코는 이미 <누군가>에서도 스기무라가 오만가지 남의 사정에 참견하면서 가족을 등한시한다는 질투(?)와 걱정을 비춘 바 있었으며, 스기무라 시점의 글인 탓도 있어서 자세히 설명되지는 않았지만(일부러?) 불안감을 드러내고 있다.
천성적으로 스기무라는 '인간'에 대한 흥미와 애정이 큰 사람이다. 그저 불쌍한 사람을 지나치지 못한다는 정도ㅡ그것도 물론 있지만ㅡ가 아니라, 늘 인간에 대한 답을 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는 나호코와의 결혼 및 장인과의 거래로 인해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관계, 평범한 세계로부터 단절되어버렸다. 그는 자기 손에 잡히는, 자기 어깨에 기대 말을 건네오는 '타인'들을 갈망하지만, 아쉬울 것 없는 평범한 삶들은 그를 거부하고, 필연적으로 남는 것은 아주 작고 약한 목소리들, 혹은 절박한 목소리들뿐이었던 게 아닐까. 스기무라는 세상과, 인간과 자신을 이어주는 그 연약한 끈들을 결코 놓칠 수 없어서 본능적으로 끌려갔던 것이고.
나호코는 그 전까지의 삶에 사랑하는 남자와 아이를 추가한 정도였지만, 스기무라에게 결혼은 나호코냐 세계냐의 선택이었고, 전자를 선택한 그는 물론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으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다. 하지만 그 '선택'을 제대로 이해했고 성실히 책임지며 그 안에서 행복을 구한다고 해도, '결핍' 자체가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1편에서도, 2편에서도 스기무라는 순간순간 세상과 자신 사이의 '벽'을 실감하고 절망하거나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나호코의 세상과 자신과의 '벽' 앞에서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인정하긴 싫지만, 불안요소는 처음부터 내장되어 있었다.
이마타 콘체른 회장의 사위. 하지만 기업 리더들의 상층부 세계에 편입된 것은 아니다. 장인은 나호코의 세계를 이곳도 저곳도 아닌 진공지대에 견고하고 아름답게 세워두고, 사위에게 그곳으로의 '존재이동'을 명했다. 충분한 '부'를 누리면서도 그 부에 대해 책임지거나, 그 부를 가지고 지배하지 않는 무중력의 공간. 나호코가 나호코로 존재하는 이상, 스기무라가 자기 내부의 갈등을 잘 단도리할 수만 있다면 나호코의 아버지로서 그의 선택은 현명했던 것 같다. 문제는 스기무라가 느끼는 존재의 불안, 내적 갈등을 고스란히 나호코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고, 자신은 그 무엇에도 적응할 필요도 없는데 스기무라는 존재 자체를 뿌리뽑혀 '이곳'으로 이동해야 했다는 그 불균형에 대해 불안과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 자체가 이미 나호코의 변화이고, 최선을 다해 함께 행복하고자 노력하던 두 사람이 서로 죄책감과 단절감,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불행의 씨앗이었달까. 결국 '선택' 이후 두 사람은 함께하는 삶 속에서 조금씩 변화, 성장했고 (누구나 그렇듯이) 변화하고 성장한 그들은 기존의 관계틀 속에서 서로 갈등없이 마주볼 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결국 한 번은 헤어져 다시 만나는 수밖에 없겠다고, 속상하지만 조금 인정하게 된다.
별개로, 중간 부분에 스기무라가 "요즘의 글쓰기는 자신의 감정을 옮기는 것 중심으로 이루어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취지의 말을 한다. 생각해보니 나 역시 '글쓰기'란 늘 '나의 감정'을 짚어보는 수단이었지 '있었던 일'을 쓰는 건 해보려고 한 적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있었던 사실'에 대해 어떤 글을 쓸 수 있을지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약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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