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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초기 작품이 이제서야 국내에 번역되었다는 소식이 의아했다. 싹싹 긁어 펴내 이젠 신작밖에 기다릴 게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굉장히 습작 수준의 작품인가 했더니 이게 의외로 몰입감이 굉장한 거다. 주인공 소년도 소년이지만, 미치오와 수사팀 캐릭터들도 좋았고 수사의 과정도 미야베 특유의 건실한 느낌에 현실감이 입혀져 은근히 끈기있게 수사망을 좁혀가는 모습이 따뜻하면서도 흥미진진했다.
그런데 이게 결말 부분을 보다 보니 과연 번역이 늦춰진 게 이해가 갔다. 사건이 급진전되어 풀리는 결정적인 실마리, 소년이 처한 위기, 그렇게 드러난 사건 자체의 결말 등등, 책의 2/3 정도까지는 너무 좋았는데 그 이후로 건실하던 이야기가 너무 전형적으로 진부하게 엉성하게 풀리면서 책 자체의 주제의식도 뭥미스럽게 정리되고 말았다. 미야베 책에 대한 이런 종류의 실망감은 처음인 것 같다. <낙원>은 그 세계관이랄까 하는 게 불만이었고 <가모저택>은 그냥 첨부터 대놓고 재미가 없었는데, 중간에 이렇게 힘이 떨어진 듯한 느낌은 낯설다.
그와는 별개로, 도쿄대공습에 대한 도고 노인의 회상과 그 그림에 대한 묘사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2차대전, 일제침략과 패전의 역사가 현재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요 네스뵈가 나치의 역사에 대해 다뤘듯이 일본사에서 그런 모습을 정면으로 파헤치는 미스테리가 나온다면 어떨지, 미야베가 그런 글을 쓴다면 굉장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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