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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을 꼬박 한 달 동안 했다.
늘 마감과 마감이 반복되는 게 일상이긴 하지만, 계간지 마감은 다른 어떤 마감과도 다르다. 관련된 사람이 너무 많고, 시간의 압박이 너무 강하다.
나도 모르게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 되버리곤 한다.
어쨌든, 이렇게 한 달 동안 마감을 치르면서 오가는 전철 안에서 읽은 책들.
1. 엄마 마피아
<오늘 죽고 싶은 나>에 이어, 같은 작가의 두 번째 소설이었다. 더 많이 웃었고, 조금 실망했다. 실망했다는 것은 '게리'가 척척 만들어내는 그 내러티브들만큼 이 이야기도 정해진 궤도에 따라 능히 독자를 즐겁게 만들고자 노련한 길을 내고 있을 뿐임을 더욱 절감했기 때문. 숨겨진 것들, 은근슬쩍 넘어가는 것들, 구태여 짚어내지 않는 편치 않은 가정들...... 우리가 즐겁기 위해 꼭 이렇게 많은 걸 기만할 필요는 없을 텐데, 라는 투덜거림.
그치만 이 소설의 가벼움과, 그 가벼움을 만들어낸 '가차없음'으로부터 나는 분명 웃음을 얻었다. 웃었고 즐거웠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 위선이거나, 위악이거나.
묘한 건지, 아님 연달아 읽는 책들에서 상념이 이어지는 건 당연한 일인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게리의 200권 보장 프로토타입(;) 글쓰기로부터 엄마 마피아, 칼의 노래, 온다 리쿠로 이어지면서 '이야기'와 '이야기꾼'과 '독자'에 대해 두서없이 이런저런 생각들을 조금씩 했던 것 같다.
2. 칼의 노래
극에서 극으로 널뛰는 소설 속의 세계들 때문에 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한없이 가벼운 <엄마 마피아>로부터 건너와서 더욱 힘들었던 것 같다. 김훈의 도저한 나르시즘, 회색 뇌 속에 이순신과 함께 갇혀 시종일관 숨이 막혀 견디기가 힘들었다.
김훈이 왜 이순신에게 반했는지는 충분히 알겠다. 김훈이 그려내고자 한 이순신은 나로서도 반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이순신에 대한 독점욕이라니. 이건 소설가가 자기의 주인공에게 바치는 애정이라기에도 너무나 집요하고 철저하다. 또한 자기 문장에 대한 애정 역시.
시대소설에서 시대와 사람을 지우고, 인물들로부터 '말'을 빼앗고, 감정과 교감마저 모두 빼앗고, 남는 건 그저...... 아, 이렇게 '우아한' 소설에 이런 발칙한 표현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남는 건 그저 김훈의 마스터베이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사무실 동료들의 이야기로는 김훈의 소설은 한 권이면 족하다, 혹은 두 권은 못 읽는다던데. 칼의 노래를 읽은 사람은 질려서 남한산성을 보기 힘들고, 남한산성을 먼저 읽은 사람은 칼의 노래를 보기 힘들고. 일단 나도 남한산성은 좀 쉰 뒤에(;) 재도전해보기로 했다.
3. 대망 <1>권
참 공교롭게도, 이순신의 '바다 건너 무형의 적'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오는 그 소설이 또 <칼의 노래> 다음 순서가 되었다. 물론 앞에 <1>권이라고 적었듯이, 요 차례에서 내가 본 건 무려 36권(!) 중의 1권이고, 아직 오다 노부나가조차 성인이 되지 못한 한참 전의 이야기일 뿐이다. 2권은 대출예약을 해놨는데 아직 소식이 없고......(이 글을 쓰다 말았던 사이 드디어 대출에 성공. 그러나 단행본 출간예정인 다른 원고 읽느라 아직 못 들추고 있을 뿐이고...)
책을 읽는 데 출판사가 선택한 홍보 컨셉, 추천의 글 등에 담긴 마인드가 끼치는 영향은 꽤 크다. 이 책의 경우 옛스런(=구식) 활자들과 끔찍하게 큰 마침표도 눈에 거슬렸지만, 'CEO라면 꼭 읽어야 할 책' 운운하는 홍보컨셉과 지루하기 짝이 없는 추천사 등이 1권 앞부분에 구만리 깔려 있어서 꽤나 짜증스러웠다. 그래도 베스트셀러에는 확실히 못마땅한 와중에도 어떤 힘이 느껴지긴 한다. 일단 본문에 진입하고 나니까 간간이 혀를 차게 되면서도 하여튼 내러티브 자체의 저력이랄까, 계속해서 책장을 넘기게 만드는 그 힘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김용 무협지의 영웅들은 한 명 남김없이 말술이다. 늘 '점소이'를 괴롭히고, 안주는 통구이 혹은 통찜류의 육류를 즐기며 (미식가 따위 호걸이 될 수 없는 거다), 하여튼 그런 게 있다. 대망에서는 '노상방뇨' 모멘트가 아주 전형적으로 사용된다;; 될성부른 아이, 씩씩한 아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거침없이 '꼬추'를 드러내고 화원이든 마당이든 창밖이든 '내갈긴다' 내 소녀적 정서(!)로는 그 진부함과 더불어 참 눈에 거슬리긴 했는데, 은연중에 그들이 간직한 이상적 '소년상'의 일면을 엿본 기분은 들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시대 시대물들에서 그녀는 에도시대를 일컬어 '죽음이 너무나 흔했던 시기였으므로 더욱 더 사람들 사이의 연대는 강해졌다'고 쓰곤 한다. '죽음이 흔했던' 것으로 치자면 이 시기가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게 없을 거다. 오다 노부나가의 전국통일 이전, 누가 대권을 잡을지 크고 작은 전쟁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벌어지던 때... 등장인물들은 마치 스스로를 완벽하게 소외시키고 있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최소한의 선택권을 지니고자 죽음으로 달려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패밀리가 떴다>에서 유재석이 "원래 내가 하려고 했었다"면서 (등떠밀려) 설겆이를 하고 불을 피우는 것처럼. 아니, 그건 최소한의 선택권을 지니기 위한 도전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했다는 '착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기 위해서랄까.
4. 3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는 기본적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을 통해 자신이 꿈꾸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소통과 교감(인간과 인간이든, 인간과 환경이든)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선택받은 사람들'이므로 당연히 모두(적어도 대부분) 뛰어난 미모를 갖추고 있고, 그들이 대부분 사춘기 소년기의 나이인 것도 때묻지 않은 비타협성과 어느 정도 성장한 자아를 동시에 담보하기 위해서 같다.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의 내면을 고집스럽게 들여다보면서 '변화하지 않는 것'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 상처받길 무릅쓰고(혹은 예상치 못하고) 세상에 꺼내놓는다.
온다 리쿠는 기본적으로 '선택받은 사람들'을 통해 자신이 꿈꾸는 섬세하고 아름다운 소통과 교감(인간과 인간이든, 인간과 환경이든)을 추구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선택받은 사람들'이므로 당연히 모두(적어도 대부분) 뛰어난 미모를 갖추고 있고, 그들이 대부분 사춘기 소년기의 나이인 것도 때묻지 않은 비타협성과 어느 정도 성장한 자아를 동시에 담보하기 위해서 같다. 고립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스로의 내면을 고집스럽게 들여다보면서 '변화하지 않는 것'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 상처받길 무릅쓰고(혹은 예상치 못하고) 세상에 꺼내놓는다.
<3월은 붉은 구렁을>은 그런 온다 리쿠의 '미소녀물'들과는 조금 다른 노선을 걷고 있다. 그야말로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의한, '이야기'를 위한 소설이라고 말하면 물론 진부하기야 하지만 나로선 그 이상의 요약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야기에는 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납득하지 못하겠어. 어딘가에 분명 이야기가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가 있어서 언젠가 그걸 발견하고 '이것 봐'라고 말할 것 같아" (비슷한) 말을 했던 그 편집자 언니야말로 '이야기 숭배'의 핵심인 듯. 네 개의 '이야기' <3월은 붉은 구렁을>을 각각 추구하고, 추적하고, 키우고, 써내려가는 네 개의 (또다른) 이야기가 모아진 것이 또 하나의 <3월은 붉은 구렁을>이다. 과문하지만 참으로 독특한 설정이었고, 전개 방식이었고, 그런데 꽤나 낯익은 공감가는 친숙한 설정과 마인드여서 그동안 읽고 좋아해왔던 온다 리쿠와는 또 다르게, 굉장히 마음을 끄는 소설이었다. 그동안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서 Yes24 마이리스트에 모아왔던 온다리쿠 소설들을 이 책을 계기로 장바구니에 쓸어담아 전격 결재. 오늘 배송될 예정이라고 한다 ㅋ
5. 흔들리는 바위
얼마나 오래 전에 읽었는지, 사실 일련번호로 따지면 절대 5번은 아니고 어쩌면 이 책이 1번인 것 같기도 한데 확실한 기억이 나지 않아서 그냥 5번에 넣는다. 여전히 나를 챙겨주시는 고마운 북스피어 사장님 만세!!
츄신구라 이야기는 얼핏얼핏 들어 대강 줄거리는 알고 있었다. 과도한 사생결단, '죽으려고 용을 쓰는' 사무라이 이야기의 전형이(라는 느낌이었더래서;;) 미미 여사를 만나면 어떻게 펼쳐지려나 했는데, 과연 미미 여사답게 풀어냈다는 느낌이다. 장르적으로 말하자면 이건 오컬트도 아니고 미스테리도 아니고 모험활극도 아니여;;; 어딘가 어중간하고, 아무래도 <외딴집>만큼의 포쓰를 내뿜는 작품이 잘 눈에 안 띄어서 조금 김이 새긴 하지만, 그래도 평균작은 된다는 느낌이다.
시대가 강요한 죽음의 길을 얼마나 용감무쌍하게 걸어가느냐가 사무라이 이야기의 포인트라면, 미미 여사는 왜 시대는 엄한 인간에게 그런 잔인한 길을 강요하고 마는 건지 되묻는다. 되묻되 시니컬하거나 공격적인 건 절대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고, '저는 모르겠어요'라고 곤란한 표정을 짓는 통통하고 귀여운 소녀가 흔들리는 영혼의 손목을 당차고 야무지게 끌어당겨 삶의 길로 되끌어오는 방식이다.
오하쓰도 매력적인 아가씨였지만, 그녀와 짝패가 되어 나오는 부잣집 도련님도 참 끌리는 캐릭터였다. 불행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은밀히 잠재된 죽음의 욕구, 마지막 희생자의 절망이 곧 소통되지 못한 사랑이었다는 슬픈 로망스도 미미 여사답게 다정했다. 이름이 너무 어려워 벌써 잊어버린 그 도련님과 오하쓰가 짝을 이뤄 사건을 풀어나가는 시리즈가 좀 더 이어졌으면 좋을 텐데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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