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아서와 나는 의좋게 지냈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거나 말다툼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친밀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함께 일했다. 내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직장에 좀 더 오래 매달려 있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나였기 때문에 두어 달이 지나자 벌써 싫증이 나고 좀이 쑤시기 시작했다. 자료를 훑어보는 일은 즐거웠지만, 수집가로서의 정신은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다루는 상품을 진심으로 경배할 마음은 결코 내키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마르셀 뒤샹이 1947년에 파리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전시회를 위해 디자인한 카달로그 -- 표지에 고무가슴이 나오는 그 유명한 카달로그, <만지시오>라는 말과 함께 브래지어 속에 대는 고무컵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 에 대해 쓰려고 책상 앞에 앉으면, 그 카달로그는 여러 겹의 투명한 랩으로 겹겹이 싸여 있고, 그것은 다시 두꺼운 갈색 종이에 싸여 있고, 그것은 다시 비닐 봉지 속에 들어 있다. 이렇게 되면 일손을 잠시 멈추고, 내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만지시오.> 뒤샹의 이 명령문은 프랑스 전역에 나붙어 있는 표지판 -- <손대지 마시오> -- 을 패러디한 익살이 분명하다. 그는 이 경고를 거꾸로 뒤집어, 자기가 만든 제품을 만지라고 요구한 것이다. 완벽한 형태의 말랑말랑한 고무가슴보다 더 만지기 좋은 게 어디 있겠는가? 그것을 떠받들지 말라고,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이 시시한 활동을 숭배하지 말라고 뒤샹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경고는 27년 뒤에 다시 한 번 거꾸로 뒤집혀, 드러난 젖가슴이 랩과 종이와 비닐로 겹겹이 가려진 것이다. 만질 수 있던 것이 도로 만질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한낱 장난에 지나지 않았던 뒤샹의 예술은 이제 너무도 진지한 상품으로 바뀌었고, 다시 한 번 돈이 최후 결정권을 갖게 되었다.
----------------------------------------<빵굽는 타자기> 中
너무나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라 그때의 느낌도 까마득하지만, 이 부분이 재미있어 접어두었던건 기억이 난다.두어 권, 예전에 읽었던 폴 오스터 소설들에 비해 훨씬 재미있었다. 내 수준에서 이해가 가고 납득이 되는 이야기면 된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든자기 자신에게서 스스로 사랑하는 어떤 면모를 지켜내기 위해 무엇이라도 포기할 수 있고 무엇과도 등질 수 있고 그러고서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 모습은 참 멋지다. 쑥스러움을 무릅쓰고 말하지만,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요즘 선망하고 있는 종류의 '강함'과는 조금 다른 컬러(;)를 지니고는 있지만 폴 오스터라는 사람의 '강함'이 잔뜩 묻어나는 소박하고 명확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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