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완전범죄에 고양이는 몇 마리 필요한가>를 권일영 씨가 번역했고, 그 사이 다른 번역가들의 작품들을 쭉 읽어봤는데 역시 일본 소설 번역은 권일영 씨가 본좌구나... 하는 새삼스런 깨달음. 앞으로도 활발한 활동 부탁드립니다 m(_ _)m
'유머 본격 미스테리'라는 조금은 낯선 장르명은 딱 히가시가와를 위한 맞춤 표현이다. 그의 첫인상은 '유머'의 강렬함이었는데, 몇 권 계속 읽어가면서 이 사람의 본질은 '본격'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차츰 들었다. 권일영 씨는 아예 유머 자체가 트릭을 가리는 또 하나의 장치, '눈은 웃지 않는' 웃음이라고까지 말하는데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본격' 미스테리에서는 범인의 동기도, 살인 이후의 내적 갈등도, 추적자와의 심리게임도, 그들을 둘러싼 인간들의 갈등과 고통, 시대적 한계도 큰 의미가 없다. 오로지 트릭. 하나의 범죄가 어떻게 성공에 이르렀고, 완전범죄의 문턱까지 갔다가 어떻게 논리적으로 설파되는지, 그 과정이야말로 '본격 미스테리'의 핵심이다.
그런데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이런 본격 미스테리의 골조 자체가 자칫 앙상하고 단순하다는 느낌을 주기 십상이다.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범죄가 바로 우리 주변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실제로 일어나는 범죄가 아니라 해도 항상 우리는 어떤 종류의 범죄 혹은 사고에 예기치 못하게 휩쓸려 들어갈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살아간다. 평화로운 정제된 공간 안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알리바이나 물증을 수사하고, 범인을 지목하고, 트릭을 밝혀내는 과정만으로는 현실감을 얻기는커녕 단순하고 유치한 수수께끼 놀이 같다는 느낌마저 줄 수 있다. 이 지점에서 히가시가와 도쿠야가 트릭을 중심으로 한 '본격'의 뼈대에 살을 붙이고, 생기를 불어넣는 방법이 바로 유머. 얼핏 바보스러워 보이는 주인공들의 숨은 통찰력을 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 (권일영이 지적했던 것처럼) 트릭을 드러내는 수많은 복선과 힌트들에서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는 전술이기도 하고.
이 책에서 수사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특이하게도 '혼성 커플'이다. 소마 다카유키 형사와 여탐정 고바야카와 사키. 술을 좋아하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심술궂고 자신감에 넘치는 메인탐정 역할은 고바야카와이고, 어리버리하게 사건현장을 누비면서 예기치 않게 결정적인 단서를 건져내(지만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역할은 다카유키 형사가 맡았다.
6개월 전, 필생의 역작인 별장을 준공시키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리라 다짐하던 건축가(이자 건축회사 사장) 주몬지 가즈오미는 별장 1층 계단참에서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된다. 시체는 있는데, 추락의 현장은 그곳이 아니었다. 결국 범인 이전에 추락현장 자체를 밝혀내지 못한 채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6개월 뒤 사건 당시 그곳에 있던 이들은 이번엔 미망인 주몬지 야스코의 초대를 받아 저택에서 오봉 휴가를 보내기 위해 모여든다. 그리고 일어난 또 다른 살인사건들. 태풍으로 고립된 섬에서 경찰의 도착이 지연되면서, 다카유키 형사와 고바야카와 탐정의 수사가 펼쳐지고, 기상천외한 트릭이 별장에 숨겨져 있음을 알아낸다는 이야기.
원래 사람들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트릭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본격 미스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은연중에 그런 건 애거서 크리스티 이후 졸업하는 거지~하고 얕잡아보는 느낌도 좀 있고. 그런데 히가시가와 도쿠야를 읽으면서 본격 미스테리에 대한 호감이 다시 생겨나고 있달까? 세상 모든 추리소설이 전부 다 슬픔과 죄책감, 분노와 절망감, 인간의 심연에 대한 치열한 탐구가 될 수도 없고 그게 옳은 것도 아니다. 어렴풋이 '이거 심상치 않은 단서군' 느꼈던 것들을 스스로 하나하나 늘어놓고, 건물 조감도도 들여다보고, 알리바이도 체크해보면서 탐정놀이를 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이, 오랜만에 다시 들었다. 비록 시간 없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냥 서사에 두둥실 업혀서 끝까지 오긴 했지만 ㅎ
'B'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0) | 2013.09.11 |
---|---|
그늘의 계절 (0) | 2013.09.11 |
살의는 반드시 세 번 느낀다 (0) | 2013.08.29 |
Q & A (0) | 2013.08.27 |
밀실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0) | 2013.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