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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란 무엇인가
박쥐
2015. 3. 5. 16:36
며칠전 버스를 타고 멍하니 가다가 문득 이 질문이 떠올랐다. 정통 추리물, 사회파 미스테리, 스릴러, 서스펜스, 하드보일드, 안락의자, 수사극, 기타등등 많은 파생단어들이 있는데 그중 제일 포괄적으로 나의 장르적 취향을 설명하기 만만한 단어가 미스테리인 거 같다. 그런데 과연 미스테리라는 건 뭘까?
일단 떠오른 핵심 키워드는 세 개다. 비밀. 진실의 추구. 탐정.
비밀은 사건과는 조금 다르다. 사건 그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범인이든 동기든 과정이든 뭔가 드러나지 않은 이면을 품고 있어야 미스테리는 시작된다. 사건은 살인일 수도, 도둑맞은 편지일 수도, 사라진 여인이거나 배달되지 않은 우유일 수도 있다.
진실의 추구. 누군가 드러난 현상에 의문을 품고 스스로 납득하고자 움직일 때 미스테리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미스테리의 전개과정에서 핵심은 그 진실의 추구가 얼마나 필연적이고 현실적인가에 달려 있다. 대충 여기저기 찔러보면서 폼만 잡고 다니다가 우연히 얻어걸린 단서가 스스로 술술 문제를 풀어버리는 걸 계속 폼만 잡으며 지켜보는 탐정은 실격. 진실은 체계적으로, 서서히, 집요하게 추적당하면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결정적인 순간 전모를 드러내야 한다. 그 전모가 드러나기 전까지 조각의 진실들이 공정하게 차근차근 독자들에게 제공되면서도 결코 쉽사리 전모를 예상할 수 없게끔 배치하는 것이야말로 미스테리 작가의 가장 중요한 재능일지도 모른다.
탐정. 당연하게도 직업으로서의 '탐정'을 넘어 진실을 추구하는 미스테리의 주인공을 말한다. 개인적인 동기에서 시작하는 사건의 관련자일 수도 있고, 직업적으로 의뢰를 받아 사건에 접근하는 인물일 수도 있지만, 좀 더 선호하는 것은 아마추어쪽이다. 왜냐하면 그쪽이 훨씬 더 진실로부터 큰 영향을 받고, 밝혀진 진실에 의해 변화된 세계와 성장한 주인공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저 '미션 완료'로 깔끔하게 사건파일을 접어버리는 경우들 중에서도 재미있는 미스테리는 많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건 보통 아마추어가 주인공일 때가 더 잦다. 어느 쪽이든 탐정은 독자 입장에서 충분히 감정을 이입할 수 있도록 매력적이고 최소한의 도덕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진실은 '인간'의 편에 서 있어야 하고, 탐정은 독자=인간의 대리자이니까.
결국 이야기는 '미스테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미스테리란 무엇인가'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나는 탐정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가벼운 사건들보다는 탐정의 세계를 송두리째 흔들고, 진실을 통해 중요한 뭔가에 변화를 가져오는 미스테리를 좋아한다. 또한 변화는 가급적 긍정적인 방향으로, 아무리 끔찍한 사건을 통해서도 일말의 희망이 보였으면 좋겠다. 물론 기계적으로, 성의없이 갖다 붙이는 진부한 희망 따위는 없느니만 못하다.
사건과 비밀, 거기서 시작되는 진리의 추구가 반드시 해결에 이르러야 미스테리는 완성된다. 중간에 누가 사랑에 빠지건 말건, 해고를 당하건 말건, 사건의 해결과 드러난 진실이 없는 미스테리는 미스테리가 아니다. 떡밥은 하나 남김없이 모두 회수되어야 한다. 알고 보니 사건과는 큰 상관 없었던 부차적 진실들이 에필로그처럼 함께 밝혀지는 것도 좋다. 그것들이 미스테리의 세계를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주니까.
결국 미스테리 역시 '사람'의 이야기여야 한다. 얼마나 끔찍한 '범죄'인지, '사건'인지에 집착하다가 자칫 '사람'을 잃어버린 작품들을 간혹 보게 되는데, 아무래도 작가가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새로움이 거기에 있기 때문일 거다. 얼핏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사람의 내면을 더 새롭게 조명하고, 상처받고 위협당하고 굴복했다가 끝내 승리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고 있고 깊이 공감할 수 있지만 새삼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는 어떤 모습을 드러내기가 어디 쉬운가? 애꿎은 시체만 자꾸 썰고 찌르고 하는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야...ㅉ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