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계단
일본 작가의 추리소설을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에도가와 란포상'이라는 일본의 장르소설 계통 등용문을 통과해서 데뷔한 작가의 첫 작품.
상해치사죄로 복역하던 젊은 청년과 교도관이 힘을 합쳐 기억상실의 사형수의 누명을 벗긴다고 하는 내용이다.
일본어라는 것이 사람의 사고방식을 그렇게 규정하는 것인지,
일본어를 번역한 책들은 '화두'가 되는 질문에 대해 답답할 정도로 차근차근하게, 어눌하지만 집요하게 계속해서 묻는다. 그 질문 자체는 별것 아닌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물어 나가는 방식이 꽤 마음에 든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고, 또 처벌될 수 있는가.
각각 법적 보호망의 안과 밖에서 사람을 죽이고, 그것이 얼만큼 옳았고 또 틀린 일이었는지 고민하던 두 남자가 '억울하게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의 죄를 벗기는 일을 일종의 '속죄'로 생각한다는 설정은 매우 자연스럽다. 난고와 준이치의 관계에서 두 사람의 변화라든지 고해를 통한 회복 같은 것들을 좀 더 섬세하게 그려냈더라면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은 들지만 장르소설이 너무 섬세해지다가는 속도감을 잃을 수 있다는 데도 동의한다. 뭐라 해도 꽤나 완성도가 높은 추리소설이었다. 막판의 반전까지, 반전을 위한 반전이라기보다는 '죄'와 '처벌'에 대한 고민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어서 '이 작가, 정말 뚝심 있구나' 하는 상쾌한 감탄을 일으켰다.
그러나 저러나, 백탑파 시리즈를 읽을 때도 '황금가지'라는 출판사의 레벨이랄까 미학이랄까 하는 것에 대해 진지한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는데 우연히 이번에 읽은 이 책도 황금가지에서 나온 책이었다. 표지가 구린 거야 말할 것도 없고 엽기적인 건 책 맨 앞쪽의 일러두기.
"이 책은 무슨무슨 종이보다 눈의 피로함을 덜어주고 질감을 개선한 e라이트지로 만들어졌습니다."라고 하면서 굉장한 기술적 진보를 이룬 것처럼 자랑을 해놨는데
e라이트지가 처음 나왔을 때 나온 책이라 해도 낯간지러운 자랑이다 싶어 뒤쪽에 판권을 확인해보니 왠걸, 2005년 11월에 1쇄를 찍었다.
...-_-;
내 기억에 처음 e라이트지를 쓴 게, 서교동 시절 2004년 1월호 특집이다-0-;
그것도 종이에 대해서 전혀 알리 없는 내가 e라이트지를 첨 만난 게 그때랄 뿐이지 사실 그 전부터 쓰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도 e라이트지, 약간의 재생지 느낌과 가벼운 무게와 칼라 잘 먹는 지질 덕분에 꽤나 인기를 끌었던 종이로 기억하는데...
그런데 2005년 말에 이르러 생뚱맞게 e라이트 자랑을 하는 저분들은 도대체 뭐하자는 얘긴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