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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브 다이어리

박쥐 2006. 1. 2. 23:27

12월 28일. 

국립박물관 부설극장 '용'에서 <러브 다이어리>라는 뮤지컬 갈라 콘서트를 보았다.

1. <아이다>에 꽉 잡혀 있는 이석준 씨의 출연작이라는 점

2. <헤드윅>의 김다현도 나온다는 점

3. 윤공주, 조정은, 호평의 뮤지컬 여배우들이 골고루 나온다는 점

등에 혹해서 "야, 재밌을 거야 캬캬캬" 친구까지 선동해가며 서둘러 예매했다.

...결과적으론, '혹세무민'이 되었다.-_-


첫 공연 때에는 배우들이 불러야 할 노래를 채 외우지 못했다는 엽기적인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하는데, 내가 본 날은 이미 세 번째 공연이어서 그런 일까지는 없었다. 자신있게 감정을 실어 노래하지 못하는 대목들은 간간이 있었지만, 나는 그게 배우 탓만으론 느껴지지 않았다. '갈라 콘서트'라는 것의 한계인 것인지 이 공연만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캐릭터도 줄거리도 없을 거라면 그냥 노래만 남기는 편이 좋았을지도. 어설픈 줄거리를 따라가느라 종잇장 캐릭터의 어색한 옷을 입고 전혀 감정이 담기지 못한 노래를 입으로만 부르는 모습은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문제는, 정말 내가 짜증스러워 견딜 수 없었던 건,

이들이 크리스마스 연말 시즌, 주머니 후려내고 싶었던 젊은 청춘남녀들에게 영합하다 못해 '사랑'을 멋대로 재단해버리고 들척지근한 사탕발림으로 그게 마치 A부터 Z까지인 양 잘난 척까지 했다는 점이다.


그들의 사랑이 넘어야 할 장애라는 건 고작,

여자가 예쁘지 않고,집안이 별로고,

남자가학력이 낮고, 키가 작고,

주변에서 '니가 아까워' '쟤가 아까워' 쫑알쫑알거리는 목소리들.

왜 하필 여자는 외모고 집안이고, 남자는 학력이고 킨데! 이것부터가 진부하고 불온했다.


흰눈 펄펄 날리는날 오빠가 나를 사랑한다 안한다 낙엽가지고 장난질 치고

오빠믿지 손만 잡고 잘께

아악... 그 노닥거리는 꼴도 참 봐주기 힘든데 그래도 진부한 나름대로 참았다.

내가 그정도로 기분 나쁜 줄도 사실 잘 몰랐다.

그냥 지루하네, 언제 끝나나 그러고 있다가

얘들이 마지막 엔딩 곡으로 '시즌 오브 러브'를 부르는데...

'니들이 무슨 자격으로 그 노래를 불러!!'

갑자기 울컥 치솟는 분노(;)에 그때서야 알았다.

나 상당히 열받고 있었구나 계속.


나레이터 역할을 맡아서 극의 통일성을 나름 책임지고 있었던 게 이석준 씨였는데,

"이건 저도 이해가 안 가네요."

"스탭한테 물어봐도 모르겠다고 하더라구요."

왠만하면 그런 태도 싫어한다. 나는 관객이니 이해 안간다 싫다 뭐라 말할 수 있어도,

거기 참여한 사람이 그렇게 자기 공연의 수준과 성과로부터 혼자 쏙 빠지려는 듯한 태도. 비겁해 보이고 '그럴 거면 왜 했냐' 싶은 거다.

하지만 이 공연에선, "그래 당신이 봐도 그렇지!!" 싶으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_-;

이석준을 좋아해서 <러브 다이어리>로부터 건져내고 싶었던 걸까.

하여튼, 내가 본 최악의 공연.

어쨌든, 특정 시기에 특정 컨셉으로 만들어진 어떤 종류의 뮤지컬 갈라쇼는 전혀 볼 만한 것이 못된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