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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4~05 내가 본 드라마들
박쥐
2009. 6. 1. 04:11
마감 기간 동안 전혀 체크하지 못했다는 생각만으로 습관적으로 '박쥐책방'을 선택하고 그동안 읽은 책을 꼽아보려니 대망 2권 읽고 3권 중도포기한 거, 그리고 <황혼녘 백합의 뼈>... 어라? 더 이상 생각나는 책이 없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하고 곰곰 꼽아보니까 (물론 한두 권 정도는 더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전철 타고 오가면서 책 대신 아이팟 클래식으로 맹렬하게 봐댄 건 드라마들이었다.
첨에 2기가 MP3가 꽉차서 아이팟 클래식 120기가를 질렀을 때만 해도, 출퇴근 길에 내가 동영상을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팟 터치에 대해서 일말의 매력도 느끼지 못했던 건 그런 이유가 컸는데 재미로 몇 개 다운받아본 뒤로 이게 책보다 일단 가볍고(!) 보기가 편한 거다. 그래서 여태까지 다운받아본 드라마를 꼽아보니......
돌아온 일지매
예전에 이준기 나온 <일지매>를 보다가 중간에 시들해져 관뒀었는데, 이 드라마도 만만치 않게 시들했지만 어쨌든 아이팟의 힘으로 끝까지 독파했다. 맘에 들었던 건 왕횡보 캐릭터. 그대는 진정한 국제인, 그리고 자유인! ㅎㅎ 그리고 성우 아줌마의 유머러스하고도 우아했던 나레이션.
줄거리는 참 지나친 우연 투성이에다 설득력도 없고 개연성도 없고 인물들의 행위에 절실한 동기부여도 없고, "잘생긴 내가 죄"라는 일지매의 우울한 표정은 웃음만 나오고. 게다가 난 분명 윤진서의 새침떼기 70년대 옆집 언니 같은 도도한 응석을 매력으로 느끼고 있었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제대로 짜증이 났다. 매번 독하게도 일지매 발목을 붙잡는 언니의 안이하고 저돌적인 사랑. 내가 일지매였음 넌 애저녁에 차였어.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가끔씩 '저 여자가 맞고 내가 너무 소극적인 건가' 싶어지기도 하고, 저렇게 해야 사랑이란 걸 할 수 있는 걸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조금씩 헷갈렸지만...... 역시 윤진서의 월이는 짜증나.
내조의 여왕
첨엔 도대체 저 재밌는 자명고를 왜 안 보고 이게 그렇게 재밌다고 보나 싶어서 한번 봤다가 '역시 재미는 있구나' 하면서 끝까지 시청. 그래도 맘속에서 계속 자명고랑 비교가 됐는데, 코믹하면서도 생활감 있는 대사와 자잘한 설정들이 전체 플롯의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재미를 유지하도록 해준 것 같다. 그러나 천지애는 1회에도 천지애였고 20회에도 천지애였다. 나는 사실 천지애 같은 여자를 결코 좋아할 수가 없던데.
남자이야기
아이팟이 없었다면 정말 절대로 보지 않았을, 아니 보지 못했을 드라마. 박용하가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쌩깔 수밖에 없는 거였는데, 주말 낮에 무심코 TV를 틀어놨다가 주인공 패거리가 벌이는 사기극 장면에 낚여서 걍 첨부터 보게 됐다. 철거촌 국면에서는 이 드라마 꽤나 대차게 MB체제를 씹는다 싶었는데, 그냥 살짝 양념 치는 정도로 갖다 입힌 수준인 것 같다. 의외로 김강우가 자기 배역에 잘 녹아들어서 보는 재미가 있고, 뻔뻔스러움이 지나쳐 놀라울 정도로 대놓고 L을 갖다 배낀 마징가 선생도 뭐 귀여운 편이다. 툭하면 이세상, 저세상 나누는 박시연의 궤변과 코찡찡거리는 목소리가 짜증나고, '남자'에 강박증이라도 걸린 듯한 박용하가 무게를 잡기 시작하면 빨리감기는 필수.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너무 전형적이고 그렇게 만들어지는 줄거리도 정말 심하게 전형적인데, 그래도 요즘 이렇게 캐릭터 아닌 스토리 위주의 드라마가 별로 없어서 빨리 감아 볼 정도의 재미는 있다.
잘했군 잘했어
어제 꺼를 다운받아 보다가 드디어 채림의 극중 나이를 알았다. 25세에 미혼모가 되어 자기 딸을 동생인 척 엄마에게 입양시키고 살다가 커밍아웃. 서른둘의 나이로 10년 동안 자기를 짝사랑하던 남자에게 드디어 마음을 열었는데 거기 7년전 자기를 떠난 애아빠가 '우리는 운명'을 외치며 진상떨며 난입해서 인생이 꼬인 여자 이야기.
주기적으로 아침드라마에 낚이는 게 내 운명인가 싶다. 등장인물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자네가 지금 이러면 안돼지" "자네가 이러고 있는 게 얼마나 우습고 억지스러운지 알아?" 그러고 싶은 욕망만으로도 한 편의 연속극을 끝까지 추격할 수 있는 거다.
여자 나이 서른에 남자가 없다면 그 인생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싱글포비아 별이 할머니를 응징할 길은 이미 없어졌고... 그저 내 남은 바람은 이호남 미친X가 모든 걸 잃고 쓸쓸히 미국으로 다시 도피하는 것, 한 가지 더 바란다면 정애리가 천호진을 되찾고 개과천선해서 오지랖을 접는 것 정도?
하우스 시즌 4, 시즌 5
오래전에 보다가 시즌 4 도중에 작가 파업이라나 뭐라나로 중단되어서 멈췄었는데, 깜빡 잊고 사는 동안 시즌 4가 끝나고 시즌 5까지 막바지였다. 신나게 다운받아서 보고, 지금 시즌 5가 네 편 정도 남아 있다.
하우스를 보고 있자면 한 편당 한 명씩, 정말 별것 아닌 이유로 죽음의 위기에 몰린 사람이 나온다. 무슨무슨 증후군, 무슨무슨 감염, 진단을 위해 환자의 병력을 뒤지고 집과 직장에서 단서를 찾으면서 차라리 뇌종양이라도 병명이 일단 나오면 "XXTTEWETT 투여해. 이틀쯤 뒤면 나아질 거야" 범인은 잡히고 사건은 해결되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인간의 몸이 짐짝같이 비루하게만 느껴지고 이렇게 숨쉬고 내 몸 내가 지탱하면서 살아 있는 것만도 신기하고 그렇다. 그닥 좋은 기분은 아니다. 의학드라마들에 흔히 양념처럼 뿌려지는 환자에 대한 인간애,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분투..... 그것보다는 그저 하우스의 추리 퍼즐게임이다. 환자의 불행이 오리무중일수록 하우스는 "Interesting..."을 되뇌이며 씩 웃음짓고, 동료들은 "House in Right"이라면서 졸졸졸 그의 뒤를 따른다.
인간이고자 하지 않고, 한사코 나쁜 사람이려고 하고, 그러면서도 윌슨에 대해선 집요하게 무조건적인 소유욕으로 집착하고, 가끔 하우스가 그 파란 눈을 조심스럽게 치켜뜨고 윌슨의 눈치를 볼 때 거세게 밀려드는(!) 미중년에 대한 로망(ㅡ.ㅜ)을 제외하면 이 드라마는 사실 소년탐정 김전일이 단물빠진 뒤 관성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추리게임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하우스의 말투와 쉼없이 쏟아져나오는 고약한 독설을 지긋이 음미하고, 그의 눈동자에 마음이 약해진다. 이 빌어먹을 미중년 콤플렉스 ㅡ.ㅜ
자명고
내조의 여왕에 치이면서 시청률 10%선을 좀처럼 못 넘기고, 급기야 조기종영설이 나돌아 너무나 안타깝다. 나라도 본방사수해서 시청율을 올려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하겠는데 어차피 표본집단으로 조사하는 거니 별무소용일 것 같아 그저 차곡차곡 다운받아서 열심히 눈물흘리며 보고 있다.
자명고가 인기를 얻지 못하는 이유 중에 '고구려 판타지'에 대한 배반감이 한 자리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짐작 때문에라도 이 드라마는 내게 지켜줘야 하는(!) 명작이 된다. 더불어 각각의 캐릭터들이 너무 훌륭하고 역동적이다. 특히 대무신왕을 열연 중인 문성근. 그리고 요즘 제대로 나쁜남자 매력을 내뿜고 있는 호동 역의 정경호. 려원은 내가 무조건 이뻐하는 배우라서 그냥 계속 이뻐 보이지만, 첨엔 비호감 캐릭터가 될 듯했던 라희의 캐릭터조차 참 설득력있게 만들어져 있어서 정말 버릴 장면, 버릴 캐릭터 하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