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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림유감

박쥐 2009. 1. 16. 15:40



저 '홍림'은 그 <쌍화점>의 홍림입니다.
혹시 스포일러가 두려우신 분이 이 포스트를 접하게 되셨다면 이 아래는 절대 보지 마세요.
스포일러로 시작해 스포일러로 끝나는 감상이라서.ㅎㅎ




















홍림이가 누구인가.
그는 어린 시절부터 소수정예로 뽑혀 조기교육을 받은 왕의 친위부대 '건륭위'의 총관이다.
"10년 이상" 왕의 침소를 드나든, 왕의 하나뿐인(맥락상 저 왕이 바람을 피운 적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애인이기도 하다.

1. 건륭위 총관 홍림이.

니가 이끄는 그 건륭위와 건륭위 총관으로서의 너. 어린 시절부터 사적인 삶 없이 궁궐 안에서 송두리째 인생을 저당잡힌 니들의 삶을 근대적 시각으로 보자면야 비극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너의 시대에는 무엇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래, 한백이의 탈영사건이나 승기의 보신주의 등으로 미루어볼 때 그 삶 자체가 니들에게 반드시 영광이기만 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짐작도 해.
근데 회한은 회한이고, 일단 니들은 국민의 혈세(!)로 먹고 입고 배우고 큰 놈들이고, 왕을 제대로 호위하라고 만들어진 집단이다. 회한은 느낄망정 할 일은 제대로 해야 하지 않냐?

(1) 소풍나온 왕의 습격 장면 + 홍림의 귀환 장면

이건 도대체가 '경호'의 기본도 모르는 오합지졸들. 아니 왕 앞에서 1대1 무술시범을 보이자는 것도 아니고, 적의 목표는 왕 하나라는 게 분명한데 저~~ 앞에 적이 나타나기만 하면 왕은 내버려두고 모두들 앞으로 돌진, 뿔뿔이 흩어지는 건 무슨 경우란 말이냐. 게다가 이놈의 궁엔 건륭위 서른 명 남짓 말고는 병력이라곤 없는 건지 비상사태가 생겼을 때 지원군을 요청하는 법도 없고 오는 지원군도 없어. 그저 개념 없는 건륭위 놈들은 우루루 몰려다니며 지 눈앞의 적군과 일대일로 맞장 뜨느라 왕을 지킨다는 기본 원칙은 아랑곳도 없고, 결국 두 번의 습격 사건에서 왕은 매번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님들아 제발 친위부대의 기본 원칙 쩜......

(2) 군인의 기강은 어디?

한백의 탈영사건은, 건륭위가 군대라면 수장으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종류의 범죄였다. 군기 빠진 한백이가 궁녀를 뒤에 태우고 "형님 이번 한 번만 길을 터주십시오" 할 때 홍림은 "갈 테면 나를 베고 가라"며 저지했다. 이것부터가 이놈의 부대 기강이 안드로메다에 있다는 걸 말해준다. 고작 '형님'과 '아우'의 '정'에 의지해서 탈영병을 달래고, '베갯머리 송사'(홍림은 길길이 뛰었지만 승기의 비판은 정확한 거였다)로 중범죄자를 아무 징계 없이 원대복귀시키는 그런 수장이 홍림이다.

나라의 중신들이 으슥한 밤에 작당해서 왕을 몰아내자는 연판장을 쓰는 현장을 잡았다. 잠복근무에 들어갔는데 그 결정적인 범죄현장을 눈앞에 두고 홍림은 모든 걸 부하들에게 맡기고 조퇴한다. 왜? 연인과의 약속시간이 지나서-0-

수장이 그 지경이니 부하들도 똑같다. 홍림이가 토사구팽 당한 것도 아니고 간신배의 모략에 누명을 쓴 것도 아니고, 명백히 지가 잘못해서 감옥에 갇힌 건데 거기 지들이 왜 뛰어들어. 나라의 감옥을 부수고, 왕의 군사를 베고, 아무런 갈등도 죄책감도 없이 사복으로 싹 갈아입고 형님의 탈출극을 돕는 이 녀석들은 정체가 뭐야? 니들이 군인이 맞아? 니들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느라들어간 국가예산과 백성의 혈세는 하나도 안 아깝냐?

자신을 탈옥시켜 절로 은신한 사복 입은 부하들 앞에서, '나같으면 정말 쪽팔리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홍림은 전혀 부끄러움도 없었고 부하들의 안위에 대한 최소한의 걱정도 없었다. 내가 죽을 죄를 지은 건데 왜 시키지 않은 짓을 하냐는 입에 발린 말 한마디 없었다. 나는 빠담풍 해도 너는 빠담풍해야 할 것 아니냐는 덧없는 꾸짓음이라도 바라고 있던 나를 홍림은 결국 배신했다.

(3) 승기가 젤 낫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 많은 사람들이 심지호 캐릭터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나는 홍림이보다 차라리 얘가 훨씬 정상적인 애 같았다. 최소한 이 녀석은 '훌륭한' 군인은 아니었다 해도 '평범한' 군인의 양심은 가지고 있었다. 부총관으로서 총관이라는 놈이 10년 동안 왕의 침소에 들락거리는 모습이 꼴같잖아 보이는 것도 당연하고, 나름 쿨~하게 나오는 녀석의 성격상 홍림이의 지지부진한 일처리도 우스웠을 거다.

다만 영화를 본 직후에는, 좀 더 멋있는 녀석이었다면 왕비가 살살 이간질을 시도했을 때 그토록 쉽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에서 좀 실망이었다. 그래도 지 혼자 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뛴 게 아니라 건륭위 부하들을 모아놓고 여태까지의 전후 사정은 이렇고 저렇다, 그런 모습은 다시 생각하면 오히려 더 납득이 간다. 왕이 연애질에 정줄을 놓고 질투심으로 폭주하고 있는 마당에 (홍림이야 원인제공자로서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승기로서는 자기 자신이든 건륭위 부하들이든, 그 폭주의 희생양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을 거다. 왕을 배신하려면 최소한 이렇게 자기 할 일은 다 한 다음에 왕이 정줄을 놓으면 그때 배신하는 거다. 넌 용서.

(4) 공사 구별 좀 하자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다. 왕은 후사가 없었고, 원의 황제는 호시탐탐 '내츄럴 본 친원세력'인 경원군을 들여보내 왕위를 잇게 할 궁리였다. 그 시점에서 경원군이 세자 혹은 왕이 된다는 건 고려가 그대로 원의 식민지가 된다는 뜻이었다.

왕은 미워도 지가 군인이면 나라 망치는 행동에 어떻게 이 지경으로 한점 망설임이 없을 수가 있는지. 이 시점에 왕을 죽인다는 게 배신한 애인을 죽이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도 아닌 거야? 홍림이고 승기고, 중신들 반란음모 쫓는 데는 열심이더니 그게 왜 이적행위인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던 건가. 치정사건이 절정으로 치닫는 동안 누구도 국경밖 원나라의 존재, 궁궐밖 백성의 생존문제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차피 치정 영화인데 뭘 그런 걸 따지냐고 하면 좀 우습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난 영화 보는 내내 고려의 운명이 너무나 마음에 걸렸다.



2. 애인 홍림이.

어쩌면 내가 정말 화가 났던 건 건륭위 총관 홍림이었고, 왕의 애인 홍림이에겐 그저 동정밖에 줄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사람 나고 연애 났지, 연애 나고 사람 났냐...... 말해주고 싶지만, 그런 말에 정신이 들 수 있는 게 치정이 아니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한 그 다양한 사단들이 났던 거겠지.

다만 그 순간에는 정말 화가 났다.
"연모의 정을 알게 해 준 (왕비의) 은혜는 하해와 같사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다. 그게 진실이어서도 안되고, 그게 진실이었다 해도 대놓고 말하는 건 정말 안 되고, 그게 거짓이었다면 홧김에 그러는 건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그리고, 죽여주십사 왕에게 빌 때는 그렇게 죄송하더니, 안 죽이고 거세하겠다니까 "차라리 죽여달라"는 건 또 뭐야, 비루하게. 내가 너무 미안해서 니가 죽이면 죽겠는데 거세는 초큼 곤란? 차라리 나를 죽이라며 자지러지는 여자의 마음이야 십분 이해할 수 있는데 거기서 온몸을 배배 꼬며 차라리 죽여달라는 홍림은 좀 추했다.


흔들리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버려진 사람은 왜 흔들렸냐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지만, 흔들린 사람이 흔들리고 싶어 그런 것도 아니고 마음이 그렇게 되버린 걸 어쩔 수가 없는 거다. 나는 왕비의 흔들림을 이해했고, 흔들리는 그녀가 안타깝고 예뻤다. 그러니까 홍림이만 욕하는 건 좀 불공평하다.

근데 흔들림 그 이후가 홍림이는 너무 비겁했다. 너무 비겁하고 무절제하고 무책임했다. 그런 주제에 피해자인 척했다. 운명을 움직일 수 있는 선택의 순간들이 없지 않았는데, 자신의 결단을 한 번도 책임있게 지키지 못했던 주제에 파국의 결말에 대해 남탓만 했다. 저렇게밖에 연애가 안 되나, 시종일관 '사람'으로서 '군인'으로서 '고려 백성'으로서 중심을 잡고자 하는 일말의 노력도 보여주지 않았던 홍림의 사랑에는 도저히 공감할 수가 없다. 

그런 모든 걸 무화시키고 지워버리는 것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난 그런 건 '사랑의 방법'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고 싶다. 누구나 함정에 빠지거나 실수할 수 있지만, "누구든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변명하는 건 싫다. 홍림이 바보. 바보가 시대를 잘못 타고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한 사랑에 빠지면 나라도 순식간에 말아먹을 수 있다. ---> 이 영화의 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