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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박쥐 2008. 7. 25. 13:40





퇴근길에 <침묵>을 다 읽고, 곧바로 <불타버린 지도>를 읽기 시작했다.
책을 권해주신 분은 <불타버린 지도>는 됐고 <침묵>을 강추한 거긴 했는데, 일단.

요즘처럼 컴퓨터 작업으로 만든 책이 아니라서 활자체만의 독특한 느낌이 왠지 모를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띄어쓰기며 마침표나 쉼표의 사용, 적절한 조사의 선택 등에 참 빈틈이 많이 보이는 책이다.


과거에는 어떤 식으로 책을 만들었던 걸까.
이 책이 특히 더 교정 작업 과정이 허술했던 걸까.

그러저러한 결점들, '구티'들이 밉살맞다기보단 정겹게 느껴지는 것도 모두 텍스트의 힘일 것이다. 오래된 책에서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냄새까지.

책을 덮으면서 지금까지도 가장 경이로운 인간은, 로드리고보다 오히려 기치지로였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다. 내가 백번 죽었다 깨나면, 물론 그래도 힘들긴 하겠지만, 최소한 나는 로드리고처럼은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치지로처럼 될 자신은 없다.

"나는요, 아파요. 주님의 얼굴을 밟은 이 발은, 아파서 견딜 수 없어요."


다른 누구를 위한 숭고한 희생도 아니었고, 오직 본인의 '약함'으로 인해 반복된 배교. 그렇지만 그는 계속 배신하고 또 배신하면서도 계속 빠아도레를 따라다닌다. 계속 본인의 약함을 토로하고 스스로를 부정하면서, 어떤 합리화도 하지 못한 채 줄곧 자신의 약함을 마주한다.

다른 세상, 예컨대 이 시대 이 땅에 태어났더라면 유쾌하고 다정한 크리스찬으로 살 수 있었을 기치지로. 하필 그 시대, 그 잔혹하고 비열한 학살의 와중에 태어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합리화시키지 못한 채, 배교하고도 신을 등지지 못한 채 평생을 그렇게 괴롭게 끈질기게.

아, 기치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