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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

박쥐 2008. 1. 4. 17:47

옹정제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 차혜원 옮김
이산 2001.01.01
평점

한동안 미스테리 소설들, 그중에서도 미야베 미유키만 읽다가 간만에 읽은 역사책이었다. 오래 전 조실장님이 회의 중에 무심코 "재밌는 대중 역사책의 모범"으로 언급하셨던 책들 중 하나. 회의문서 구석에 써놓았다가 그 다음 알라딘 책쇼핑 때 샀는데 얼마나 오래 방구석에 처박혀 있었나 모르겠다. 왜냐하면, 일단 밋밋하잖아. 책 제목도, 표지디자인도 밋밋하기 이를 데 없다. 그나마 책이 얇았기 때문에방구석 책더미 사이에서 뽑혀나올 수 있었다. 나머지 책들... 그대들은 좀 더 기다려줘야겠어.-_-;

책이 얇은 만큼서술도 거침없다.큰솥에 멸치국물이 펄펄 끓는데 투박한 손이 밀가루반죽을 큼직큼직하게 빛의 속도로 떼어넣고 있는 느낌이다. 달인이다! 과감한 생략과 단정적인 어투들임에도 조금도 '속는 느낌' 같은 건 없다. 저자에 대한 사전지식 전혀 없이도 '진짜'에게는 '진짜'의 '투'가 있는 거다. '아놔 이거 뭐지' 하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책 최종장에서 대충 '부자'라는 느낌으로 '자본'이라는 말을 쓴 데는 거부감이 생겼지만, 저자가 문헌학자라니까 뭐... 중요한 부분도 아니고 대충 새겨들으면 될 일)

청왕조는 중국의 변방에서 '오랑캐' '야만족'에 의해 시작되어 명의 패망 후 중국 전체를 '접수'했다. 한족이 구축해놓은 막강한 문화적 권위와 두께는 청의 입장에서는 애초부터 부정할래야 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낫놓고 기억자나 알겠냐고, 근본없는 무지랭이들이라고 얕잡아보는 시선은 한족들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책에서는 자세히 서술하고 있지 않지만, 청왕조의 황제들이 자기 내면의 컴플렉스를 제국의 힘으로 전화시켜나가는 과정에 대해서 많은 상상을 하게 되었다. 옹정제의 아버지였던 강희제가 중국을 접수하면서 당시 중국에 쏟아져들어오고 있던 서양문물에 강하게 끌렸던 이유는 뭘까.어느 정도 왕조의 힘이 증명된 뒤 옹정제는 한족보다 더 월등한 한문화의 주인으로 자기를 증명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면서. 어릴 때 봤던 추억의 외화 시리즈... 제목이 '야망의 세월'이었나? 그것도 생각났고.

너무 일면적으로 역사속 인물을 받아들이는 게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똑똑한 일은 아니라는 거 알고는 있지만, 저자가 스스로 몰아가는 게 아니라 독자가 일종의 '삘'을 받아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역사속 인물을 만나는 건 확실히 짜릿한 경험이다. 빨간펜 선생님 옹정제가 지방 관리들 캐구박하면서 성질부리는 기록들도 너무너무 재밌다. 문헌학 연구로종이 먼지 마시며잔뼈가 굵은 베테랑 학자가 과감하게 각주 참고문헌 다 생략하고 '대중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쉽고 정확하게 전하는 소박한 글... 어쩐지 '학문의 사회환원'이라는 생각이 들어 더더욱 흐뭇했다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