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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_나무로 만든 노래

박쥐 2007. 9. 17. 16:39



공연장 입구에 형광봉을 파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밥이 "살까? 저거 흔들 수 있을까?" 물었다.

나는 "에이... 오빠면 몰라도 동갑한테 형광봉 흔들어줄 순 없지"라고 말했다.

김밥은 "그렇지, 동생이면 또 모르는데 동갑은 좀 그렇지"라고 말했다.

동갑.

내게 이적은 두 가지 다른 의미의 존재.

하나는 보컬리스트 이적. 가끔은 곤혹스러울 정도로, 별로 잘 부르는 것도 아닌 그의 음색에 마음이 무장해제되곤 했다. 어느 시기에 이적의 지지부진한 행보에 짜증을 내면서도 그의 찡얼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한흐느적흐느적 꺾이는 목소리엔 자꾸 귀가 따라가곤 했다.

두 번째가 바로 '동갑' 이적이다.

73년생 연예인, 가수야 뭐 찾아보면 훨씬 더 많이 있겠지만,

패닉을 처음 만나던 그 시절부터 이적은 늘 '동갑내기' 이적이었다.

73년생. 92학번.

여성학자 페미니스트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시절 또문을 들락거리고 대학에선 학회평론에도 기웃거렸다던 그의 행적은 (물론 구체적 경로나 색깔이야 다르지만) 어쩐지 나 자신의 성장과정을 상기하도록 만들었고 <다시 처음부터 다시>라든지 특히 닥치고 <왼손잡이>에서는 (생각해보면 어이없지만) 운명까지 느끼게 되었다. 생물학적인 왼손잡이인 나, 그리고 화내는 듯 숨어버리는 "영특하고 비겁한 이기주의자"의 자기고백까지. 얘는 왜 나와 이렇게 비슷한 걸까?

그랬다. 이적도 나도 그리고 나의 92학번 친구들도

우리는 꽤 영특했다.

우리의 영특함이 왜 우리를 전진(!)하게 만들지 못하는지, 어떤 사람들은 화를 내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어떤 사람들에게 자주 "미안해"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따라 서쪽 숲으로 가지 못하는 (실제로는, "가지 않는" 것이었지만) 자신을 불행하게 여겼다. 그런데 그들은 알고 있었을까? 혹은 우리는 알고 있었나?우리들이 남몰래 그런 자신을 깊이 사랑하고, 거기 도취되어 살아왔다는 사실을.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랑에 빠졌지만 한 번도 그를 '숭배'해본 적은 없다. 자아도취도 귀찮고 남에게 변명하는 것도 싫증이 나서 속세를 떠나다시피 사는 동안에 어느새 그의 노래를 찾아듣는 일도 없어졌다. '에구, 너도 참 변하지 않는구나' 생각했고.

그러다 어느 시절 문득 다시 이적을 들으며 '너도 나와 같이 나이를 먹고, 늙어가고 있구나'라는 느낌에 애잔해졌던 기억이 어렴풋. 한심하다면 걔가 아니라 나. 용서한다고 해도 걔가 아니라 나. 어차피 내가 들었던 이적은 걔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김밥과 나란히 '추억의 보조석'에 앉으며 걔의 상술에 가볍게 분노해주고, 고작 27회 안팎의 공연을 (그것도 '추억의 보조석' 꽉꽉 채워 중극장 규모에서 몰아치면서) 마치 공연계의 착실한 꿈나무인양 '척'하는 홍보행태도 살짝 씹어주고,

그리고 뭉근히 앉아 걔의 노래를 들었다.

그 노래들을 만들고 부르며 나이를 먹어온 걔의 세월과, 그 노래들을 듣다가 말다가 나이를 먹어온 나의 세월. 또 옆에는 김밥의 세월이.

이제는 전만큼 이적이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얘기는, 이제야말로 내가 '나'로부터 조금은 거리를 지니게 되었다는 뜻이겠지. 그 지나온 세월들이 나를 조금은 내 자신으로부터 떨어뜨려 지긋이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주었으니, 다행이다. 이적도 그만큼은 되었을까. 김밥은, 어떠냐.

음.

그리고 또.

그리고 사실은, 나도 어두운 관중석에서 15년 세월이 지난 뒤 너와 나란히 앉아 '다행이다'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아주 오랜만에, 노래방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수아 얘기 하기 전이라구!)